鳳 山 智 氏
봉 산 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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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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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 제3권 - 현종 원문대왕 顯宗元文大王 -3

신해 2년(1011), 송 대중상부 4년ㆍ거란 통화 29년

○ 봄 정월 초하루 을해일에 거란주가 서울에 들어와서 태묘와 궁궐ㆍ민가에 불을 질러 모두 타버렸다. 이 날 왕은 광주(廣州)에 머물렀는데 두 왕후가 간 곳을 잃어 채문에게 가서 찾게 하였다. 요탄역(饒呑驛)에 이르러서야 만나 모시고 돌아오니, 왕이 기뻐서 왕후를 위하여 3일 동안 머물렀다.
○ 정축일에 하공진ㆍ고영기가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공진 등을 붙잡아 두니 호종하던 여러 신하들은 공진 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달아나는데, 오직 시랑 충숙(忠肅)과 장연우(張延祐)ㆍ충순(忠順)ㆍ주저(周佇)ㆍ유종(柳宗)ㆍ김응인(金應仁) 만은 떠나가지 않았다.
○ 무인일에 왕이 광주를 출발하여 비뇌역(鼻腦驛)에서 머물렀다. 채문이 아뢰기를, "호종하는 장수와 군사가 모두 처자를 찾는다 칭탁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어두운 밤에 간적(姦賊)이 몰래 일어날까 두려우니, 청컨대 표지를 만들어 장수와 군사들의 관에 나누어 꽂아서 분별하게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기묘일에 유종이 아뢰기를, "양성(陽城 경기 안성군(安城郡))은 신이 대대로 거주한 고을인데 이곳에서 거리가 멀지 않으니, 양성으로 행차하소서." 하니, 왕이 기뻐하며 드디어 행차하였다. 밤에 유종과 김응인 등이 거짓으로 왕의 명령이라 일컫고 임금의 말안장을 부수어 고을 사람에게 주었다. 날이 샐녘에 고을의 아전[吏]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유종과 응인 등이 또 두 왕후를 각기 그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호종하는 장졸을 임명하여 동쪽 변방으로 가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왕이 이에 대해 채문에게 묻자 채문이 크게 울면서, "지금 임금과 신하가 도리를 잃어 앙화를 당하여 이와 같이 파천하고 있으니, 마땅히 인의(仁義)에 따라 행동하여 인심을 수습해야 될 것인데, 왕후를 버리고서 살기를 구하는 일을 어찌 차마 하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하고 드디어 떠나갔다. 사산현(蛇山縣)을 지나다가, 채문이 기러기 떼가 밭에 내려앉는 것을 보고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리고자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갔다. 기러기가 놀라 날아오르자, 몸을 돌려 쳐다보고 쏘니 시위 소리에 맞춰 기러기가 떨어졌다. 왕이 크게 기뻐하자, 채문이 말에서 내려 기러기를 주워 왕의 앞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하중에 이 같은 사람이 있는데 어찌 도적을 근심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크게 웃으면서 위로하고 권장하였다. 천안부(天安府 충남 천안)에 이르니 유종과 응인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먼저 석파역(石坡驛)에 가서 음식을 준비하여 영접하겠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도망하였다.
○ 신사일에 왕이 공주(公州)에 머무니 절도사 김은부(金殷傅)가 예를 갖추어 교외에 나와 영접하면서 아뢰기를, "성상께서 산과 물을 지나시고 서리와 눈을 무릅쓰시며 이렇게 지극한 상황에 이르실 줄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하고, 이어 의대(衣帶)와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서 옷을 갈아입고 토산물은 호종하는 신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날이 저물녘에 파산역(巴山驛)에 이르니 아전들이 모두 도망하여 수라를 들지 못하시게 되었는데, 은부가 바친 음식이 마침 이르러 아침과 저녁에 나누어 올렸다. 왕이 채문에게 이르기를, "현덕왕후(玄德王后)는 잉태를 하였으니 마땅히 멀리 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본관이 선주(善州) 경북 선산군(善山郡))인데 이 곳에서 멀지 않으니 선주로 보내야 하겠다." 하였다. 채문이 전일의 의논을 고집하였으나 왕은, "사세가 할 수 없다." 하면서 드디어 왕후를 보내었다. 여양현(礪陽縣(전북 익산군(益山郡) 여산면(礪山面))에 머물렀을 때 장수와 군사들이 배반할 마음을 두자 채문이 아뢰기를, "성조(聖祖 태조)께서 후삼국을 통합할 때에 공이 있는 자는 비록 공이 작더라도 반드시 상을 주셨는데, 하물며 지금은 험난한 지경을 겪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마땅히 먼저 상을 내려 권장하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라 현안지(玄安之) 등 16명을 중윤(中尹)으로 임명하였다.
임오일에 삼례역(參禮驛 전북 전주군(全州郡) 삼례면)에 이르니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이 야인의 옷차림으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였다. 박섬(朴暹)이 아뢰기를, "전주는 곧 옛 백제로서 성조께서도 미워하셨으니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소서." 하니, 왕이 옳다 여겨 바로 장곡역(長谷驛)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날 저녁에 용겸이 왕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왕의 위세를 끼고 호령을 하고자 꾀하여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ㆍ순검사(巡檢使) 최집(崔?)ㆍ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과 더불어 흰 표지를 관에 꽂고 북을 치고 소리지르며 나아갔다. 채문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왕은 왕후와 더불어 말을 타고 역청(驛廳)에 있었다. 채문이 지붕에 올라 묻기를, "너희들이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 있느냐. 유승건이 왔느냐?" 하니, 적이 말하기를, "왔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너는 누구냐?" 하니, 적이, "너는 또 누구냐?" 하였다. 채문이 다른 말로 대답하니 적이 말하기를, "지장군(智將軍)이로구나." 하였다. 채문이 그 소리를 알아듣고 말하기를, "너는 친종(親從) 마한조(馬韓兆)로구나." 하였다. 이어 왕명으로 승건을 부르니, 승건이 말하기를, "네가 나오지 않으면 내가 감히 들어갈 수 없다." 하였다. 채문이 문 밖으로 나가서 승건을 불러 어가의 앞에까지 오게 하니 승건이 울면서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용겸이 한 짓이므로 신은 알지 못합니다. 청컨대 명령을 받들어 용겸을 불러 오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였더니 승건이 나가서 도망해 버렸다. 왕이 양협(良?)에게 명하여 용겸과 이재를 불러오게 하였다. 그들이 오자 여러 장수들이 죽이려 하였는데, 채문이 꾸짖어 이를 말리고 두 사람을 시켜 대명궁주(大明宮主)의 말을 이끌고 가게하였다가 얼마 뒤에 전주로 돌려 보내었다.
○ 을유일에 거란 군사가 물러갔다.
○ 정해일에 왕이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羅州)에 들어갔다.
○ 경인일 밤에 적정을 염탐하는 사람이 거란 군사가 이르렀다고 잘못 보고하니, 왕이 크게 놀라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채문이 아뢰기를, "대가(大駕)가 밤에 나가시면 백성이 놀라 요란할 것이니 행궁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신이 염탐해 알아본 후에 행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채문이 나가서 살펴보니 통사사인(通事舍人) 송균언(宋均彦)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이 거란의 전봉(前鋒)인 원수(元帥) 부마(駙馬)의 서신과 하공진의 주장(奏狀)을 가지고 왔다. 채문이 그들을 데리고 행궁으로 나아가니, 왕이 공진의 주장을 보고는 거란 군사가 벌써 물러간 것을 알고 기뻐하며 균언을 도병마녹사로, 정열을 친종낭장(親從郞將)으로 삼았다. 거란 부마의 서신은 거란 문자로 썼는데 해독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 신묘일에 귀주 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이 중랑장(中郞將) 보량(保良)과 함께 거란 군사를 쳐서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 임진일에 양규(楊規)가 거란 군사를 무로대(無老代 평북의 주ㆍ군)에서 습격하여 머리 2천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3천여명을 빼앗았다.
계사일에 양규가 또 이수(梨樹)에서 싸워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머리 2천 5백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1천여명을 빼앗았다.
○ 을미일에 왕이 행차를 돌려서 복룡현(伏龍縣)에서 머물렀다.
○ 병신일에 양규가 또 여리참(餘里站)에서 싸워 머리 1천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1천여 명을 빼앗았다. 이날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 경자일에 왕이 전주에 머물러 7일을 지냈다.
○ 임인일에 양규가 다시 거란 군사의 전봉을 애전(艾田)에서 맞받아 쳐서 머리 1천여 급을 베었다. 조금 후에 거란주의 대군이 불시에 이르자, 양규와 김숙흥이 종일토록 힘껏 싸웠으나 군사가 모두 죽고 화살이 다하여 모두 적의 진중에 뛰어들어 죽었다. 양규는 후원도 없는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한 달만에 모두 일곱 번 싸워 거란 군사를 매우 많이 죽이고 사로잡혀 있던 사람 3만여 명을 빼앗았고, 낙타ㆍ말ㆍ무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얻었다. 거란 군사는 여러 장수들에게 초격(?擊)되었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지쳤으며 무기를 모두 잃어버렸다.
계묘일에야 압록강을 건너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는데, 진사(鎭使) 정성(鄭成)이 이를 추격하여 그들이 반쯤 건너갔을 때에 뒤에서 치니 거란 군사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이 모두 수복되었다.
○ 중대성(中臺省)을 폐지하고 다시 중추원을 설치하였다.
○ 채충순(蔡忠順)을 비서감(?書監)으로, 박섬(朴暹)을 사재경(司宰卿)으로, 주저(周佇)를 예부시랑 중추원직학사(禮部侍郞中樞院直學士)로 삼았다. 박섬은 안북(安北)에서 도망하여 서울에 돌아와서 그 가족을 거느리고 본향인 무안현(務安縣)으로 가다가 길에서 왕의 행차를 만나 나주까지 따라갔다가 얼마 뒤에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거란 군사가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왕을 뵙자 곧 이 벼슬을 주니 사람들의 비난이 많았다.
○ 2월 정미일에 왕이 전주를 출발하여 무신일에 공주에 머물러 6일을 지냈는데 절도사 김은부(金殷傅)가 맏딸을 시켜 어의(御衣)를 지어 바쳤다. 그로 인하여 그를 맞아들이니 곧 원성왕후(元成王后)이다.
○ 양규에게 공부상서를, 김숙흥에게 장군(將軍)을 증직하였다.
○ 중랑장 지채문(智蔡文)에게 전지 30결을 내려주었는데, 교하기를, "짐이 적을 피하여 먼 길에 낭패를 당했는데 따라온 신하중에 도망해 흩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채문만이 풍상을 무릅쓰고 산천을 지나며 말고삐를 잡는 노고를 아끼지 않고 끝내 송죽같은 절개를 보전하였소. 진실로 남다른 공이 많으니 어찌 특별한 은전을 아끼리오." 하였다.
○ 정사일에 왕이 청주(淸州)에 머물렀다.
○ 감찰어사(監察御史) 안홍점(安鴻漸)이 아뢰기를, "거란 군사가 장단(長湍)에 이르자 바람과 눈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감악(紺岳)의 신사(神祠)에 깃발과 군마가 있는 듯하여 거란 군사가 두려워서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옛날에 진(秦) 나라 부견(?堅)이 진(晉) 나라를 치다가 팔공산(八公山)의 풀과 나무가 진(晉) 나라 군사로 변한 것을 바라보고는 두려워 물러갔으니 신명이 돕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청컨대 맡은 관청이 보답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연등회를 행궁에서 거행하였다. 이후에는 으레 2월 보름에 연등회를 거행하였다.
○ 경신일에 왕이 청주를 출발하여 정묘일에 서울로 돌아와서 수창궁(壽昌宮)에 거처하였다.
○ 형부가 아뢰기를, "유언경(劉彦卿)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보답하려 힘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앞장서서 적에게 항복했으니 그 처자를 귀양보내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3월에 유진(劉瑨)을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조지린(趙之?)ㆍ최사위(崔士威)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았다.
○ 여름 4월에 탁사정(卓思政)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삼았다.
○ 종묘에 비오기를 빌고 시사(市肆)를 옮기며, 짐승의 도살을 금하고 우산[?]과 부채[扇]를 쓰지 않으며,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고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였다.
○ 유사에 명하여 양규(楊規)의 아내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 곡식을 주고 아들 대춘(帶春)을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고, 왕이 친히 홍씨에게 교서를 지어 내려주기를, "너의 남편은, 재주는 장수의 지략을 갖추고 겸해 정치하는 도리를 알아 절의를 다하고 정성을 바쳤으니 충성스러운 지조는 비할 데가 없다. 요전에 북쪽 변경에서 구적(寇賊)을 뒤쫓아 잡아 성(城)과 진(鎭)이 보전되고, 여러 번 싸움에 이겼으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렀으니 항상 그 공로를 생각하여 너에게 종신토록 해마다 벼 1백 섬을 내려주리라." 하였다.
○ 노정(盧?)에게 예빈경(禮賓卿)을 증직하였다.
○ 대장군 채온겸(蔡溫謙)ㆍ신영한(申寧漢), 낭장 원태(元泰), 별장 최원(崔元), 습유(拾遺) 승리인(乘里仁), 태사승(太史丞) 유인택(柳仁澤)이 전사하였으므로, 그들의 집에 쌀과 베로 차등 있게 부의(賻儀)를 주었다.
○ 유사에 명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전사한 해골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 재상에게 교하기를, "《논어(論語)》에, '위태하여도 돕지 아니하고 넘어져도 붙들지 아니하면 저 신하를 어디 쓸 것이냐.' 하였으며, 《서경(書經)》에, '나무가 먹줄을 받으면 바루어지고 임금이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 하였으니, 군신간의 의리로 어찌 마음을 다하여 바로잡아 구제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짐이 외람되이 왕위를 계승한 후로 고생과 위태함을 고루 겪었으므로 아침 저녁으로 조심하고 부끄러워하면서 허물이 없기를 생각하고 있으니 경들은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힘써 보좌하고, 나가서는 뒷말을 하고 보는 앞에서는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송악(松岳)에 비오기를 빌었더니 큰 비가 왔다.
○ 공부 낭중 왕첨(王瞻)을 거란에 보내어 군사를 돌이킨 데 대해 사례하였다.
○ 영빈관(迎賓館)과 회선관(會仙館)을 설치하여 여러 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다.
○ 5월에 동북 여진(東北女眞)의 추장(酋長) 저을두(?乙豆)가 그 무리 70명을 거느리고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그들에게 의복과 은으로 만든 기명을 각각 내려주었다.
○ 평양의 목멱(木覓)ㆍ교연(橋淵)ㆍ도지암(道知巖)ㆍ동명왕(東明王) 등의 신에게 훈호를 올렸다.
○ 문하시랑 평장사 위수여(韋壽餘)가 늙었다고 퇴직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 가을 7월에 최사위(崔士威)를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장연우(張延祐)ㆍ채충순(蔡忠順)을 함께 중추사(中樞使)로 삼았다.
○ 형부가 아뢰기를, "낭중(郞中) 백행린(白行隣)은 왕의 행차가 남쪽으로 파천할 그 즈음에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스스로 어사중승(御史中丞)이라 일컫고, 이인례(李因禮)ㆍ거정(巨貞) 등과 더불어 종들을 모집하여 군사를 삼았으나 적군을 보자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니 제명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교하기를, "지난 해에 거란이 서경을 포위하자 사문(沙門) 법언(法言)이 의용(義勇)을 떨쳐서 제 생명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죽었으니 수좌(首座)를 증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 8월에 형부가 아뢰기를, "조용겸(趙容謙)ㆍ유승건(柳僧虔)ㆍ이재(李載)ㆍ최즙(崔?)ㆍ최성의(崔成義)ㆍ임탁(林卓)은 주상께서 남쪽으로 행차하실 때에 행궁을 놀라게 하였으니 제명하고 귀양보내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문인위(文仁渭)를 우복야(右僕射)로, 장연우(張延祐)를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로 삼았다.
○ 강조의 당을 논죄하여 탁사정(卓思政)ㆍ박승(朴昇)ㆍ최창(崔昌)ㆍ위종정(魏從政)ㆍ강은(康隱)을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귀양보내었다.
○ 교하기를, "증 장군(贈將軍) 김숙흥(金叔興)이 스스로 변성(邊城)을 지키면서 적군과 싸우는 데 용감하여 이미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공을 이루었으나 마침내 진중에서 목숨을 바쳤다. 옛 공로를 생각하니 마땅히 후하게 상을 주어야겠다. 그 어머니 이씨에게 한평생 해마다 곡식 50석을 주라." 하였다.
○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원신(崔元信)을 거란에 보내었다.
○ 관인전(寬仁殿) 문에 거둥하여 늙은이ㆍ고아와 홀아비ㆍ병이 위독한 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
○ 참지정사(參知政事) 최사위(崔士威)를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삼았다.
○ 송악성(松岳城 개성(開城))을 보수하였다.
○ 서경에 황성(皇城)을 쌓았다.
○ 동여진이 백여 척의 배로 경주에 침입하였다.
○ 청하(淸河 경북 영일(迎日))ㆍ흥해(興海(경북 영일))ㆍ영일(迎日 경북 영일)ㆍ울주(蔚州 경남 울산(蔚山))ㆍ장기(長? 경북 영일)에 성을 쌓았다.
○ 9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 조지린(趙之?)이 졸하였다. 지린은 관리로서의 재간은 있었으나 성품이 술을 좋아해 밤낮으로 즐겼다. 목종(穆宗) 때 이부시랑 지은대사(吏部侍郞知銀臺事)에 임명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붕당을 만들고 남의 것을 마구 들어먹는다고 비난하였다.
○ 탐라(耽羅)에서 주ㆍ군의 예(例)에 따라 주기(朱記)를 내려주도록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 겨울 10월에 유방(庾方)을 참지정사 서경유수 겸 서북면 행영도병마사(參知政事西京留守兼西北面行營都兵馬使)로 삼았다.
○ 도관 낭중(都官郞中) 김숭의(金崇義)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冬至)를 하례하였다.
○ 궁궐을 수선하고 건축하였다.
○ 11월에 형부 시랑(刑部侍郞) 김은부(金殷傅)를 거란에 보내어 생신을 하례하였다.
○ 12월에 문인위(文仁渭)를 참지정사로 삼았다.
○ 교하기를, "옛날의 현명한 왕들은 백성을 자식과 같이 대하였으니, 짐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으랴. 방금 흉년을 당하고 또 지독한 추위를 만났으니 오직 홀아비나 과부, 고아나 자식없는 외로운 자들이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그런 이들이 있는 고을에서는 각기 의복과 양식을 주어 생활하게 하라." 하였다.
○ 이해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주기(周起)가 아뢰어 비로소 진사(進士)의 시험에 성명을 봉하는 법[糊名法]을 정하였다.
○ 거란이 하공진(河拱辰)을 죽였다. 예전에 공진이 억류를 당하였을 때 속으로 본국에 돌아오기를 도모하여 겉으로 충성스럽고 근실함을 보이니 거란주가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공신이 고영기(高英起)와 은밀히 모의하고 거란주에게 아뢰기를, "본국이 이미 멸망하였으니 신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검점하고 오겠습니다." 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얼마 뒤에 고려 왕이 서울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영기는 거란 중경(中京)에 있게 하고 공진은 연경(燕京)에 있게 하며 모두 양가(良家)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공신이 준마를 많이 사들여서 동로(東路)에 벌여놓고 본국에 돌아갈 계획을 하니 어떤 사람이 그 계획을 밀고하였다. 거란주가 국문하니 공진이 사실대로 빠짐없이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제가 본국에 대해서는 감히 배반할 마음을 가질 수 없으니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살아서 대조(大朝)를 섬기고 싶지 않습니다." 하였다. 거란주가 의롭게 여겨 그를 용서하고, 절개를 바꿔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타일렀으나 공진의 말이 더욱 강경하고 공손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살해를 당하였다.

[자료출처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 고전국역총서]




고려사절요 제3권 - 현종 원문대왕 顯宗元文大王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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