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 山 智 氏
봉 산 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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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2003-11-27 22:33:42, Hit : 11250, Vote : 2595
 고려말 최영(崔塋)장군, 11세손 현(賢) 공의 외손자


11세손 현(賢) 공의 사위인 최원직(崔元直) 공의 아들이 고려말의 청렴결백의 표상이 된 최영(崔塋) 장군(1316~1388)이다.

이러한 사항은 봉산지씨대동보에 기록되어 있다.

최영 장군의 한시로 "녹이상제 살지게 먹여.."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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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이상제 살지게 먹여 시냇물에 씻셔 타고,
용천설악(龍泉雪鍔)을 들게 갈아 두러메고,
장부(丈夫)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을 세워 볼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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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塋) - 화원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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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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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이상제 : 좋은 말을 가리킴.
'녹이'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말로, 주나라 목왕이 탔다는 여덟마리의 준마 중의 하나.
'상제'는 굽에 흰털이 난 좋은 말
-살지게 : 살이 오르게
-龍泉雪鍔(용천설악) : 좋은 칼의 대유
-爲國忠節(위국충절) : 나라를 위하는 충성스런 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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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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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준마를 기름지게 먹여서 시냇물로 깨끗이 씻어 타고/
보검(寶劍)을 잘 들게 갈아서 둘러메고/
장부의 나라에 대한 충성스러운 절개로 위업을 세워 볼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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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장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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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 http://pwj32.com.ne.kr/1/1_1_2.htm ]

구파발에서 통일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교외선을 지나 오른쪽으로 필립핀군 참전기념비가 나오고, 그 옆에 ‘최영(崔塋)장군 묘 입구’라는 표석이 서 있다. 표석을 따라 사이 길로 좀 들어가면 대자리 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서 산 기슭으로 다시 3~400m 올라가면 대자산 중턱에 최영장군의 묘가 있다.

“내 평생 탐욕을 가졌으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로되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으리라.”고 했던 장군의 유언대로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붉은 무덤(赤墳)이어서 “최씨 앉았던 자리엔 풀도 안 난다.”는 속설을 낳기도 했다는 이 무덤이 지금은 장방형의 묘테가 둘려지고 잔디가 입혀졌다.

조선왕조가 망한 후인 1928년 장군의 19대 방손(傍孫)이요, 육당 최남선의 부친인 최헌규(崔獻圭)가 500년 만에 처음으로 묘역을 정비하고 비석을 세웠다.

그 옆에 비석이 또 하나 서 있는데 1970년에 역시 그 후손으로 국방대학원장을 지낸 최대명(崔大明)예비역 소장이 묘역을 재정비하면서 세운 것이란다.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낸 최유청(崔唯淸)의 5대손으로 명문에서 태어난 장군은 16세 때 사헌부 간관(司憲府諫官)을 지냈던 그의 부친 원직(元直)으로부터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훈(遺訓)을 받은 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였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고, 공민왕 원년(1352)에 조일신(趙日新)의 역모를 진압하여 무명(武名)을 떨치기 시작했다.

100년 가까이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오던 고려는 1354년 원나라로부터 반란군인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는데 조정군(助征軍)을 보내라는 요청을 받고, 39세의 최영을 대장군으로 삼아 2,000명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케 했다.

원나라에 도착한 장군은 그곳에 있던 고려인 20,000명을 함께 지휘하여 곳곳에서 빛나는 무훈을 세웠고, 이때의 체험으로 원나라 군사보다 고려군사가 우수하고, 후일 명나라의 군사가 된 반란군보다도 고려군사가 강하다는 것을 알면서 후일 북벌을 계획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반란군을 제압하고 돌아온 장군은 쇠망의 길로 접어드는 원나라로부터 국권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로 알고, 동으로는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의 잃었던 땅을 되찾고 서로는 압록강을 넘어 요양(遼陽)에 이르는 교통요지를 제압하는 등 북진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의 방대한 지역에 창궐한 홍건적은 좀처럼 꺾이지 않았고, 북상하다가 원군에게 밀리자 방향을 고려로 돌렸다. 1359년에는 4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여 의주와 평양이 유린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1361년에는 10만이 밀려와 개성까지 함락됨으로써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다음 해에 최영과 이성계가 힘을 합하여 개경을 탈환하였고, 왕이 환도하려 할 제 재상 김용(金鏞)이 왕의 행궁을 습격한 역모가 있었으나 최영이 이를 진압했으며, 이어 원나라에서는 등을 돌린 공민왕(恭愍王)을 밀어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우려고 역신 최유(崔濡)에게 군사 일만을 주어 입국케 하였으나 또한 최영이 이를 무찔렀다.

그 후로도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하고, 1376년에는 연산의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한 왜구를 삼멸하려다가 원수 박인계(朴仁桂)까지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61세의 노구를 이끌고 나가 진압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와 경륜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수상)의 지위에 오른 장군은 나가면 반듯이 이기는 상승장군이요, 들어오면 부정과 불의를 퇴치하는 강직한 재상이었다.

중원의 정세는 원나라가 쇠하고 명나라가 일어나고 있었음으로 그 동안 원나라로부터 받았던 압제와 수모에서 벗어나려고 반원친명(反元親明) 정책을 썼으나 명나라는 도리어 감당키 어려운 세공(歲貢)을 요구할 뿐 아니라 철령(鐵嶺: 현재의 강원과 함경 사이의 고개)이북의 땅은 원래 원나라가 직할하던 곳임을 내세워 명나라에 반환하라고 요청하고 나왔다.

그리하여 조정은 막강한 신흥세력인 명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다고 하는 친명파(親明派)와 아직도 만만치 않은 원나라와 다시 손을 잡고 요동(遼東)을 먼저 장악하여 명나라의 동진을 막아야 한다고 하는 친원파(親元派)로 국론이 갈리기 시작했다.

최영은 강경파의 수장으로서 북진정책을 고수했고, 명나라의 압박이 거세어지는 와중에서 우왕(禑王)의 뜻도 북진에 있었다. 그리하여 이성계 일파의 4불가론(四不可論: 1.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 2.여름에 출병하는 것, 3.원정군이 나가면 왜구가 그 허를 노릴 염려가 있는 것, 4.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를 누르고 출병을 강행하였다.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우왕 14년(1388) 4월 18일에 서경인 평양을 출발하여 북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기충천한 출발은 아니었다. 장수들이 자기 의사에 반하여 나가는 출진이었는데도 불만에 찬 장수들을 총사령관인 최영장군이 직접 지휘하지 않은데 문제가 있었다.

과거 최영장군이 제주도의 목호(牧胡)반란을 진압하러 간 사이에 공민왕이 암살되었던 일을 생각하는 겁 많은 우왕이 한사코 최영장군을 73세의 노령이라는 이유로 개경을 떠나지 못하도록 잡아 놓았기 때문이다.

압록강을 건너기도 전에 시작된 장마는 4불가론을 폈던 이성계에게 구실을 주었고, 드디어 조민수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5월 22일에 역사적인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였다.

가기 싫은 북진 길은 더디고 더디어서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20일이 걸렸는데 회군하는 길에는 속도가 붙어서 불과 11일 만인 6월 3일에 개경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릇된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게 한 최영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최영장군은 고양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처형되었으며, 우왕도 강화도로 쫓아내고 그의 아들 아홉 살 난 창왕(昌王)을 세웠다가 얼마 후에 우왕은 요승 신돈(辛旽)의 자식임으로 창왕 부자가 모두 왕씨가 아니라고 하여 죽이었다.

가짜를 제거하고 참 왕을 세운다(廢假立眞)는 구실 하에 신종의 7대손인 정창군(定昌君)을 공양왕(恭讓王)으로 세웠다가 후에 그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켰다.

민족의 숙원이던 북진의 꿈이 무산되면서 마지막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순절한 충신이요 명장이었던 장군은 수 많은 설화 속에 숭앙되고 있으며, 무속(巫俗)에서까지 가장 인기 있는 영웅신이 되어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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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장군 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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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www.buddhasite.net/dharmadhatu/bang.php?table=gal_cult&query=view&l=360&p=1&go=3#view_first ]


아래 쪽이 최영장군, 위쪽은 그 아버지 최원직 공의 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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